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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05    추천 0   덧글 2   트랙백 0 / 2019.10.29 07:12:29

1.

세계는 두 종류가 있다. 보이는 세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는 세계 위에선 사람들이 살아간다. 사람들만이 살아간다.

 

자신들이 모르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선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뒷면,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그 속에서 미친 듯이 투쟁하며 때때로 보이는 세계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할 때마다 그 목격담은 설명할 수 없는 괴현상이나 미스터리로 남는다.

 

혹은 그것을 자신들만의 입맛에 맞추어 각색하기도 한다.

 

, 신선, 요괴, 악마, 마법사, 몬스터,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지만, 대화보단 단절이, 관심보단 무관심이 많은 도시의 길거리에 한 남자가 멀뚱히 선 채 전봇대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정말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이 없는 전봇대와 눈싸움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자, 선우가 지긋이 응시하는 것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였다.

 

[실종자를 찾습니다]

 

짧고도 확고한 문구 아래로 실종자의 얼굴과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실종자 부모의 진심 어린 처절한 전언도.

 

최정현.”

남자, 선우가 실종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켰다.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잠금을 해제하자 잠금 화면과 다름없는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인터넷 아이콘을 터치하고서 뉴스를 뒤적거린다.

 

뉴스는 오늘도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이한 자극적인 제목으로 가득했다.

 

폭행, 실종, 살인, 재판, 뭐 이런 키워드들.

 

그 중 선우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한원리 OO고등학교 여학생, 이민원 양 실종 5일째.]

 

사람이 사라진지 5일이 지났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다.

 

물론 기사가 초점을 맞춘 것은 5일이 지났음에도 사람을 찾지 못한 경찰들의 무능력함이었다.

 

기자의 의도가 제대로 들어맞았다. 글 실력이 좋은 것인지,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경찰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최정현과 이민원, 두 실종자의 공톰점이었다.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와 전단지를 번갈아 읽어갔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시시가각 떠올랐다.

 

뭐하냐?”

 

가만히 스크롤을 내리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우는 돌아보지 않고서 대답했다.

 

독서.”

“...전단지 읽는 것도 독서가 맞긴 하지.”

 

같은 반 친구, 최지원은 조금 더 다가와 스마트폰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살폈다.

 

, 이거 요새 유명하지. 우리랑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서. 엄마가 나보고 밤길 조심하랜다. 자기가 보기엔 실종이 아니라 납치라나?”

 

최지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 나 같은 놈 납치해서 쓸 때가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걸?”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학원을 안 끊어줘서.”

그렇긴 하지.”

 

밤길을 조심하고 싶어도 학원이 끝나면 한밤중이니 결국 위험에 노출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입으로는 조심하라고 해도 결국 남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특성이다.

 

오히려 나보단 네가 더 조심해야 하지 않나? 넌 집도 멀어서 많이 걸어야 하잖아...”

 

지원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짐짓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선우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아니다. 밤길에 널 보면 범인도 어련히 알아서 피하겠지.”

 

190이 넘는 신장에 옷 아래로 숨겨진 근육 덕분에 조금도 가늘어 보이지 않는 덩치가 무엇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다.

 

처음 체육시간에 옷 갈아입는 것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누가 직업을 물어보면 학생이 아니라 보디빌더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몸이었다.

 

대화를 나누느라 화면조작을 멈추고 있자, 화면이 꺼지면서 검에 물들었다. 선우는 다시 화면을 켰다. 금도끼, 은도끼가 교차된 잠금 화면이 다시금 존재감을 내보였다.

 

지원이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여전히 특이한 배경이야.”

너만 할까.”

 

선우가 알기로 지원의 잠금 및 배경화면은 육망성과 염소 머리를 한 악마였다.

 

오컬트, 판타지, 악마학. 전부 다 지원의 취미다.

 

지원은 조금도 기죽지 않은 채 도리어 선우의 금도끼 은도끼 화면에 관심을 보였다.

 

어디...금도끼 은도끼면 그 산신령 맞지? 연못에 도끼 빠뜨린 나무꾼한테 거짓말 안 했다고 금, , 쇠도끼 종합선물세트 전해준 거.”

맞아.”

나도 어디 연못에 도끼 빠뜨리면 금덩이로 바꿔주려나?”

글쎄? 내가 듣기론 연못에 도끼 던지는 놈 있으면 도끼로 머리를 찍어버리겠다던데.”

무서운 산신령이군...”

 

선우의 농담(?)에 어울려준 최지원이 주제를 바꿔 말했다.

 

, 나도 인생에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 막 이세계로 간다거나? 아니면 가문의 가보에 사실 악마가 들어있거나?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그게 사실 인간이 아니라거나, 뭐 이런 것들.”

“...딱히 좋은 일들이 아닌 것 같은데.”

 

악마는 당연히 논외고, 외국 여행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아예 다른 세계에 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거기다 공포게임의 프롤로그 같은 비인간적 존재와의 접촉은 일반인인 최지원에게 그리 좋은 미래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의 생각과는 다르게 벌써 지원의 뇌는 온갖 판타지적 현상을 자신의 입맛에 변형시켜 찬란한 미래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일단...공주랑 막, ? 아니면 서큐버스, 흡혈귀도 좋지.”

그래. 뭐 힘내라.”

 

딱히 다른 사람 미래에 관여할 자격은 없었기에 선우는 적당히 옹호해주었다.

 

지원은 곧 학원을 가기 위해 떠났고, 선우 또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

 

학원을 마치고 학생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자 시간은 벌써 밤이었다. 태양과는 다른 은은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멋을 지닌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달 주변으로 어둠과 동화된 구름이 흘러갔다. 구름은 달빛을 지나치면서 어둠을 벗었다. 대신 어둠을 입은 달이 잠시 모습을 가리자 하늘 전체에 으스스한 기운이 깔리는 것 같았다.

 

밤의 거리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가방도 없이 그저 교복만을 입은 채 거리에 서있는 선우의 모습은 조금 특이해보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의 주위를 무심히 지나쳐갔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선우의 그림자에 섞였다, 다시 멀어져갔다.

 

밤이군.”

 

선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밤은 예로부터 인간이 아닌 것들의 시간이었다.

 

지금은 건물과 가로등의 빛이, 달라진 사회구조가 인간들을 밤 아래에서도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밤의 주민들은 그런 인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늘을 보던 고개를 내린 선우가 걷기 시작했다.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넜고, 자동차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뒤로 하며 점차 구석으로 향했다.

 

도로에서 멀어지고, 주택가가 나타났다.

 

건물 불빛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한정된 공간 안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넣기 위해 만들어진 높은 구조와 수많은 칸으로 나누어진 건물을 본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한 물체가 떠올랐다.

 

음료수 자판기.’

 

인간이 아닌 것들, 인간을 잡아먹는 것들의 시선엔 저 고층건물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의문을 품고서 선우는 골목길로 향했다. 건물 사이를 빠져나와 건물의 불빛 대신 가로등이 길을 밝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어둠은 짙어졌고, 사람들의 기척은 멀어졌다. 도시환경조성을 위해 심어진 나무가 마치 옛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했던 숲처럼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선우는 길 앞쪽에 있는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중년남성의 모습이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엎어진 중년인의 모습은 술 취한 취객보단 갈 곳 없는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아니면 그저 아픈 마음에 지쳐 쓰러진 것이거나. , 이유야 다양하지 않겠는가.

 

선우는 중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

 

중년인은 어눌한 신음을 흘리더니 마주 손을 뻗어 잡았다. 선우는 그대로 손을 끌어 중년인을 일으켰다.

 

두 다리로 선 중년인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선우의 몸에 기댔다.

 

“...고맙네.”

 

중년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한 쪽 어깨를 중년인이 쓰고 있었기에 선우는 반대쪽 팔로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을 켜자 두 도끼들의 배경과 함께 현재시각이 나타났다.

 

슬슬 집에 갈 시간이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선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거 말고.”

 

중년인의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또렷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가로등의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건 가로등뿐만이 아니었다. 핸드폰 화면에 노이즈가 발생했다. 선우는 당황하지 않고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중년인이 계속 말했다.

 

정말 고마워. 마침 배가 고팠거든.”

아니 뭘...”

 

선우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중년인이 먼저 움직였다. 중년인의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흉기로 변한 중년인의 손톱이 빠르게 사냥감을 찔렀다.

 

중년인의 머릿속에서 몇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사냥해왔던 인간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관통된 복부에서 피를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도움을 요청하다, 마지막엔 자신의 식량이 되어주는 것.

 

중년인은 곧 처참하게 일그러질 한 청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하지만 1초 뒤, 표정을 일그러뜨린 것은 선우가 아닌 중년인이었다.

 

끄악!”

 

내질렀던 손목에서 화끈한 감촉을 느낀 중년인이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몸마저 굳지는 않아서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중년인이 멀어지자 가로등의 깜빡거림도 멈췄다.

 

환하게 밝혀진 가로등 불빛의 아래에 선우가 있었다. 그가 손을 쥐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뻗은...중년인의 손이었다.

 

선우가 중년인을 보며 말했다.

 

이거. 안 가져갑니까?”

...”

 

중년인이 빠득 이빨을 갈았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사냥꾼이었던 자신이 이제 사냥감이 된 것이다.

 

사냥꾼, 선우가 말을 이었다.

 

인간고기는 맛있었나? 이민원, 최정현, 유민지, 강현중...이 사람들 말고 또 얼마나 더 먹었어?”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거였냐?”

사냥 방법이 다 똑같아서, 그러게 머리를 좀 더 굴리지 그랬나.”

 

중년인...아니. 요괴, 손톱마귀의 사냥방법은 단순하고도 복잡했다. 밤길에 일부러 쓰러진 행인을 연기한 뒤, 자신을 돕기 위해 다가온 사람들만을 선별해 잡아먹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 밤에 혼자 돌아다닌 것이다. 녀석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녀석이 오히려 자신에게 접근하도록 만들려고.

 

계획은 들어맞았고, 그 결과가 현재다.

 

이런 찢어죽일...!”

 

자신의 사냥방법이 폄하당한데다, 역으로 이용당하기까지 한 손톱마귀의 얼굴이 더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송곳니만으로 모든 치아가 이루어진 요물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길게 찢어진 눈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났다.

 

옛날 사람은 물론이고, 미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도 마주하자마자 뒷걸음질 칠 것 같은 외모였지만, 선우는 태연했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직업 때문이었다.

 

그래. 어린 퇴마사야. 날 어찌할 셈이냐? 이 자리에서 서로 죽고 죽여 볼 작정이냐? 비록 내 네놈의 함정의 걸렸다 할지라도...”

퇴마사 아니다.”

 

선우가 딱 잘라 말했다. 잠시 정적이 떠오르던 가운데 선우의 말 또한 이어졌다.

 

무당도 아니고. 저기. , 보이나?”

?”

 

유성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지나가고, 달빛이 땅을 부드럽게 내리쬈다.

 

손톱마귀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말 그대로였다. 산이 있었다. 다만, 요괴의 눈엔 단순한 산 이상의 것 또한 함께 보이고 있었다.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는 산의 진짜모습.

 

손톱마귀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 집이지.”

 

선우가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긴 내 구역이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손톱마귀가 절망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망할...산신령이었나?”

정확히는 후보.”

 

선우가 산신령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손톱마귀는 빠르게 태도를 고쳤다.

 

“...습격한 것은 사과하겠네. 용서해다오. 앞으로 사람을 먹지 않겠다고 약조할 테니 이번 한 번만 날 놓아줄 수 없을까?”

 

손톱마귀가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굴복이 빨랐던 만큼, 돌아오는 답 또한 빠르고 간단했다.

 

용서는 내 역할이 아니라서.”

 

허공에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선우가 그것을 쥐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검이 한 번 흔들렸다.

 

요괴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참격이 날아갔다. 초고속의 참격이 허공을 난도질했다.

 

후두두둑. 손톱마귀의 몸뚱이가 수십 토막 나서 바닥으로 흘렀다.

 

일을 끝마친 선우가 몸을 돌렸다.

 

가로등을 빠져나온 그가 다시금 밤하늘 아래에 섰다.

 

빙산이 그러하듯, 이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고 크다.

 

퇴마사, 무당, 요괴, 사제, 악마, 유령,

 

선우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민이었다.

 

산신령 후보 겸 수호자.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는 수호자다.


2.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정확히는 오전 7시였다.

 

선우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체조를 끝내고 집으로 귀가했다.

 

물론 팔다리에 같은 크기의 쇠보다 무거운 팔찌와 발찌를 단 채, 산 뒤쪽의 절벽을 왕복한 것을 단순한 체조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의 절벽등반과 일반등산코스를 차례로 완료한 선우는 이마에서부터 땀을 한가득 흘린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그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돌아왔니?”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집 안에선 향긋한 음식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 할아버님도 일어나셨군요. 좀 더 빨리 돌아와서 준비를 도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얹혀사는 입장에 집주인을 보필하지 못한 것을 들어 스스로를 질책하며 선우가 말했다.

 

산신령 후보라고는 하나, 딱히 이 금령산의 산신령과 혈연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운 좋게 어릴 적 맡겨져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으면서 등 따뜻하게 자고, 교육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산신령 후보라는 지위도 진짜 현 산신령에게 잠시 부여받은 거품에 불과하다.

하하. 기특한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씻어라. 은령이가 또 냄새난다고 혼낼라.”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씻기 전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선우는 힐긋 늙은 산신령의 요리과정을 살펴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손도끼가 도마 위에 올라간 재료를 토막 내고 있었다.

 

전직 도끼 산신령이신 할아버지의 손엔 식칼보다 도끼가 익숙하다.

 

*

 

흐르는 물에 몸을 씻었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그의 선명한 근육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수도꼭지를 돌려 잠근 뒤, 선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단전丹田에 자리 잡은 기운이 꿈틀거리며 몸과 바깥의 힘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체온이 빠르게 치솟았고, 열풍이 그의 주변을 돌며 물기를 말렸다.

 

물기가 어느 정도 마르자 다시 몸 상태를 정상으로 돌리고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닦았다.

 

실내용 반팔셔츠와 바지까지 갈아입은 뒤, 샤워 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이미 요리는 끝나 음식을 담은 식기들이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산신령 할아버지가 의자에 먼저 앉은 채 선우를 맞이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잠시 부탁할 게 있는데, 괜찮을까?”

얼마든지요.”

 

선우는 주저하지 않고 즉답했다. 하지만 전직 산신령의 얼굴은 힘없이 굳어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은령이 좀 깨워서 같이 먹자고 해줘.”

...”

 

그러고 보니 수저가 세 개다. 하지만 사람은 두 명 밖에 없었다. 남은 하나는 아직 꿈나라에 있을 것이다.

 

잘 될 진 모르겠지만...일단 깨워보겠습니다.”

안 되면 둘이서 먹지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엔 딸과 함께 아침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욕망을 실현시켜줄 해결사는 선우였다.

 

선우는 산신령 할아버지의 딸, 금은령의 방을 보더니 깨울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녀의 아침은 사납다. 함부로 깨웠다간 욕만 얻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단잠을 깨뜨린 벌을 받게 되겠지.

 

그것을 피하려면 적절한 수단이 필요했다.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방에 직접 들어가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핸드폰을 꺼내 단축키를 눌렀다.

 

빠르게 신호가 갔다. 인적 드문 산골, 말 없는 두 남자의 정적을 꿰뚫고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약 5초 뒤, 벨 소리가 끊겼다.

 

21세기의 현대인은 사람의 목소리보다도, 문 노크소리보다도, 핸드폰 벨 소리에 민감하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서 선우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누나, 일어났어요?”

 

답장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돌아왔다.

 

[...왜 갑자기 아침부터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그게. 같이 아침식사를 했으면 해서.”

 

이번에도 대답은 늦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의 기분으로 기다렸다.

 

대답은 느려도 확실히 도착했다.

 

[10분만 기다려.]

.”

 

. 통화가 끊겼다. 선우는 산신령 할아버지를 돌아봤다. 할아버지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10분이 지났다. 두 사람이 먼저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가운데 은령의 방문이 열렸다.

 

맑은 연못처럼 하늘빛이 감도는 백발을 흔들며 한 여성이 나타났다. 위아래로 짧은 옷차림이었지만, 어차피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으니 옷차림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쪽을 보며 다가오는 가운데, 한 손에 든 핸드폰의 액세서리가 흔들렸다. 금도끼 은도끼가 교차된 액세서리였다.

 

그녀 안에 잠재된 난폭한 기운을 감지한 선우는 재빨리 움직였다.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빈 의자를 밀어 앉을 공간을 확보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 앉으실래요?”

 

매너가 그를 살렸다.

 

은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밥 먹으면서 눈치 볼 필요는 없는 듯했다.

 

그리하여 전설의 도끼 산신령의 딸이자 현 금령산의 산신령, 금은령이 아침식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딱딱 울리는 가운데 은령이 입을 열었다.

 

그놈. 잡았다며?”

잡진 않고 죽였어요.”

 

손톱마귀의 일이었다. 은령이 무심히 대꾸했다.

 

아쉽네. 살려서 데려왔으면 내가 목을 잘라줬을 텐데.”

제가 대신 토막 냈으니 화 푸세요.”

화는 안 났어. 내 구역에서 깐죽거리기에 좀 짜증 난 것뿐이지. 정말 화가 났다면 네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갔을 거야.”

그러네요.”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후보 겸 대리에 불과하다. 본래 산의 수호를 맡아야 할 자는 다름 아닌 눈앞의 은령이었다.

 

...본인 성격상 일처리가 그다지 빠르진 못하지만.

 

맡긴 일도 잘 끝냈겠다. 상이라도 줄까? 혹시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은령이 물었다. 선우는 상이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은령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상이라는 단어가 당황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의 무의식에 잠들어있는 음습한 욕망이 꿈틀거리며 존재를 내보였다.

 

선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번뇌로다.’

 

속으로 중얼거린 선우가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지금은 딱히 없네요.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도 될까요?”

그러든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이어가고 있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목소리도 들렸다.

 

[택배 왔습니다.]

 

어린아이의 것처럼 높고도 얇은 목소리였다.

 

선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먼저 일어났다.

 

제가 가볼게요.”

 

잠시 식사를 멈추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작은 꼬마아이가 보였다.

 

선우가 꼬마아이의 복장을 살폈다. 어린 외모와는 다르게 입은 옷은 확실한 배달부의 것이었다.

 

작은 배달부는 그 귀여운 얼굴을 들어 선우를 올려다보더니 옆구리에 멘 배낭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배낭의 틈으로 배낭보다 더 큰 봉투가 조금의 구김도 없이 빠져나왔다.

 

신선우 씨 맞으신가요?”

. 맞습니다.”

 

4차원 주머니가 연상되는 와중에 배달부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여기 싸인 부탁드립니다.”

 

선우는 배달부가 내민 펜과 종이 또한 받고서 수신자 확인 칸에 이름을 써넣었다. 펜과 종이를 돌려받은 배달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난쟁이 마녀 택배의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그 뒤로 배달부는 몸을 돌려 껑충껑충 뛰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판타지 같은 광경이었지만, 정말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는 선우에겐 드문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받은 봉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나한테?’

 

*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했다. 은령은 당연히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시청하기 시작했기에 설거지는 산신령 할아버지와 선우의 몫이었다.

 

설거지가 끝난 뒤 선우는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USB가 하나, 그리고 웬 학생증처럼 생긴 카드가 하나 있었다.

 

이게...뭐지?”

? 그거 환락원 생도증인데?”

 

반응한 것은 의외로 은령이었다.

 

생도증이요? 잘못 온 건가?”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난쟁이 마녀들도 실수를 하나보다.

 

생도증은 원래 생도의 사진이 들어있어야 할 부분이 하얗게 비어있었다.

 

애초에 환락원이란 곳의 생도가 아닌 자신에게 온 것부터가 이상했지만.

 

...혹시 그거 때문인가?”

 

은령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 입을 벌렸다. 선우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지금 내 밑에 인턴...알바 같은 느낌이잖아? 산신령 대리.”

그렇죠.”

그럼 너도 엄연히 이쪽 세계의 인간이란 말이지? 그것도 꽤 유명한 산신령이랑 관계된?”

커흠..!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전직이자 진짜 도끼 산신령이 자랑스레 기침했다. 은령이 그것을 어이없이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당연히 이쪽 세계의 상식도 알아야 하고, 이쪽 세계에서 인정되는 학력도 있어야겠지? 환락원은 그런 학력을 부여해주는 교육기관 정도?”

학력? 그런 것도 필요했나요?”

당연한 것 아냐? 나만 해도 거기 졸업생인데. 산신령 일을 아무나 할 수는 없잖아.”

 

선우는 놀라웠다. 매일 먹고, 자고, 노는 것밖에 모르는 이 산신령이 그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나 방금 굉장히 불쾌한 생각을 읽었어.”

언제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은령 산신령님.”

크흠! , 좋아.”

 

한층 기분이 좋아진 은령이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튼 나 대신해서 활동하다 보니까 그런 게 날아온 것 같은데, 대충 군대 입영통지서로 보면 돼. 입영통지서랑은 다르게 거부도 가능하지만. 그래서 사진이 없는 거고. 어차피 정식 후계자도 아니니까. 나중에 낙하산 취급 좀 받겠지만...어차피 너 이 주변에서 밖에 활동 안 하잖아?”

거부했을 때의 패널티는 없다, . 그럼 환락원에 가겠다고 하면요?”

일단 여길 나가서 거기 적힌 대로 환락원에 간 뒤에 여러 가지 시험 치르고, 적당히 승급해서 졸업하고, 다시 돌아오는 거지. 간단해.”

 

옆에서 전직 산신령이 보충했다.

 

환락원은 세계 각지에서 가지각색의 종족과 능력자들을 모아 단련시키는 곳이야. 단순히 고등학교 가는 느낌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조금 다른 건가요?”

대학교와 군대의 중간쯤으로 생각해보렴. 요계, 혈계, 수라계, 우리 수호자들은 그런 이계의 존재들로부터 세상을 지켜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 그래서 환락원은 단순히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미래의 수호자들을 단련시키는 곳이기도 해.”

 

전직 산신령이 선우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니? 미룬다면 미룰 수도 있고, 아예 가지 않을 수도 있어. 모든 건 네 생각에 달렸지. 다시 말하지만 거긴 마냥 따뜻한 배움의 터가 아니야. 부상은 물론이고, 죽어나가는 놈도 매년 생겨나. 만약 요괴들이 미래의 적들을 짓밟겠다고 쳐들어오는 경우가 생기면 더 늘어나고. 전쟁 중이니까 말이야.”

 

연령도, 종족도, 신념도, 힘도 다른 각 계층의 능력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사고는 당연히 터지게 되어있다.

 

가볍게 말할 사항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선우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난 찬성.”

 

은령이 불쑥 손을 들어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 가운데 그녀가 당당히 말했다.

 

네가 정식으로 자격을 취득해서 오면 내 나머지 업무도 전부 다 너한테 떠넘길 수 있게 되잖아.”

 

그냥 가지 말까?

 

선우는 진심으로 그것을 고려해봤다.

 

*

 

아직 햇빛이 중천에 떠있는 시간. 강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그 미약한 흐름에 바위표면이 깎여나갔다.

 

강가의 주변에도, 강물의 아래에도 그렇게 깎이고 깎여, 이내 둥글어진 자갈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조용하고 부드러운 모습들과는 다르게 강가의 상류에는 거센 물보라를 동반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콰아아아! 폭포는 넓고도 높아서 한 벌 쓸려 내려가면 그대로 추락해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그 폭포를 앞에 두고서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선우가 앉아있었다.

 

거북의 등껍질처럼 생긴 이 바위는 선우의 수련장소 중 하나였다.

 

선우는 평소와 같이 목검을 휘두르는 대신 가만히 앉아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아침수련, 식사, 택배...

 

환락원.

 

환락원에 대해 두 산신령에게서 들은 뒤, 방으로 돌아가 노트북에 USB를 꽂고 파일을 전송시켰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자 환락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났다.

 

학급, 수업방식, 방침, 시설, 그 밖에도 등등.

 

그렇게 알게 된 환락원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폭탄이었다.

 

그래도 가볼 가치는 있어.’

 

아니. 정확히는. 그렇기에 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철은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목검을 쥐었다.

 

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정면의 폭포를 향했다. 폭포 위로 새로운 상이 겹쳐졌다.

 

목검을 옆으로 감아 발검자세를 취했다. 전신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응축되었던 힘이 폭발했다. 검은 빛살이 되어 휘둘러졌다. 보이지 않는 참격이 뻗어나가 강물과 폭포를 거슬렀다.

 

쩌억! 폭포가 사선으로 갈라졌다. 전설 속 거인이 스스로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휘두른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참격은 폭포를 가르고도 힘이 남아 아예 터트려버렸다.

 

콰아아! 폭포를 이루던 물줄기가 한순간 완전히 날아갔다. 허공에서 쪼개진 수많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물방울은 짧고 강렬한 비가 되어 쏟아졌다. 강 표면에 수많은 파문이 생겨났고, 발을 디디고 있던 바위가 완전히 젖어버렸다.

 

가자.”

 

그렇게 결정했다.

 

다시금 쏟아지기 시작한 폭포를 뒤로 하고 선우가 몸을 돌렸다.


3.


남은 시간동안 선우는 두 산신령에게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조언을 받았다.

 

의외로 은령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직 산신령은 사실 환락원이 세워지기 전부터 활동했던 터라 따로 거기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자잘한 문제들 또한 두 산신령이 알아서 처리해줬다.

 

선우는 한 친구를 떠올렸다. 최지원, 몇 없는 친구들 중 하나. 그와의 인연이 아쉽지는 않았다.

 

선우는 이면세계의 주민이었다. 그 인간들의 세계보다, 온갖 괴물들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그는 살아간다.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는 명백하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일주일 뒤, 저녁 1155. 선우는 USB에 담겨있던 대기 장소에 도착했다.

 

환담역 10번 출구를 통해 내려가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고 넘어갔다.

 

막차가 끊긴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어서 지하철역은 전체적으로 으스스해보였다.

 

전등 빛이 유달리 어두웠고,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았다.

 

선우는 스크린도어에서 두 발짝 떨어진 채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2. 지정된 시간이 되었다.

 

이제 곧 환락원으로 가는 지하철이 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 어두운 지하를 밝히던 전등이 일제히 빛을 잃었다.

 

선우는 태연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과 초인적인 감각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후우우. 신음소리와 바람소리를 반쯤 뒤섞은 소리가 역에 흘렀다. 동시에 초록색 도깨비불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등을 대신해 떠오른 도깨비불은 분위기를 전환시키긴 커녕 더 악화시켜갔다.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이 순간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온 선로의 끝,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부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왜애애애앵. 그것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또한 선로의 끝에서부터 튀어나온 것 또한 고양이를 닮았다.

 

다만, 그 크기가 지하철 만하다는 것만 조금 달랐다.

 

거대 고양이는 자신의 지네처럼 다닥다닥 붙은 발로 사뿐히 선로를 뛰어오더니 그대로 선우를 지나쳐갔다.

 

완전히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높이만큼이나 길이 또한 지하철과 비슷한 거대 고양이는 자신의 옆구리만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선로의 끝과 끝을 가득 채웠다.

 

벽처럼 이동을 막던 스크린도어는 어느새 사라진 뒤였지만, 대신 고양이의 옆구리가 문을 대신해 갈라졌다.

 

동심을 자극하네.”

 

어릴 적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의 떠오른 선우가 피식 웃었다. 스케일은 이쪽이 더 컸다.

 

거긴 버스였지만, 이쪽은 지하철이니까.

 

이걸 고양이 지하철...아니. 영물교통이라고 하던가?’

 

이면의 세계엔 특이한 생명체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단순히 크기만 큰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 특수한 이능력이 있는 놈들까지.

 

어쨌든 지금은 이걸 타야지.’

 

고양이의 옆구리가 벌려져 만들어진 문은 하나가 아니었고, 그 문 사이로 음습한 도깨비불이 아닌 진짜 따사로운 빛이 새어나왔다.

 

도깨비불이 그 빛을 피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뭉쳤다.

 

선우는 굳이 문을 고르지 않고 그냥 자기 앞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문의 경계를 넘어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옆구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메워졌다.

 

대신 창문처럼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생겨났다. 그 구멍들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완전한 구멍은 아니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얇고 탄력 있는 막 하나가 바깥과 안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선우는 안쪽의 광경을 한 번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고양이털이 나있고, 재질이 부드러워 보인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진짜 지하철과 다를 건 없었다.

 

재질불명의 손잡이가 천장에 나있고, 긴 좌석이 간격을 두고서 배치되었다. 구석엔 노약자를 위한 곳이 마련되었다.

 

노약좌석엔 다른 좌석과는 달리 고양이 발바닥의 젤리 같은 무언가가 추가로 나있었다.

 

한 번 앉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번뇌로다.’

 

스스로를 꾸짖은 선우는 적당한 위치의 좌석을 골라 앉았다.

 

그리고 다른 승객들을 살폈다.

 

고양이 지하철의 안쪽엔 선우를 제외하고도 다른 승객들이 있었다. 나이 대와 복장, 분위기 같은 것이 전부 다 다른 자들이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선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꽝인가?”

당첨이지. 우리한텐.”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 말을 신호로 하여 날카로워진 공기가 피부를 따갑게 자극했다.

 

부드러운 좌석도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다.

 

반대쪽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입학증. 가지고 있지? 좋은 말로 할 때 넘기지 그러나.”

 

생도증은 다른 말로 입학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칸이 공백인 동안, 선별이 진행되는 동안은 다른 누군가가 그 생도증을 뺏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생도증을 지닌 채 환락원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그럼 거기서 입학시험을 치를 자격을 부여받는다.

 

정말이지 누가 만든 제도인지...”

 

인간의 욕망과 투지를 자극하는 듯한 규칙에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기간 동안 공백의 생도증을 소지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전투적 행위는 허가된다.

 

또한 그 전투적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규칙이었지만, 생도증을 반납하여 환락원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채 생도증을 소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그 규칙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21세기에 그딴 규칙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당연히 인간이 아닌 것들이 만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에선 천 년을 거목처럼 버티는 존재들이 있다.

 

천 년 동안 힘을 쌓고, 권력을 쌓고, 인맥을 쌓는다. 그리하여 정상에 오른 자들이 만들어낸 규칙을 밑의 것들이 따른다.

 

21세기 현대인의 관점으론 이해하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그래도.’

 

일단 안전장치는 걸어두지 않았는가. 생도증만 반납하면 그만이다. 물론 선우에겐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되돌아가기에도 늦었고.

 

다시 묻지. 입학증, 넘길 생각 있나?”

...”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타앙! 격발 음이 울렸고, 그것보다 빠르게 총알이 쏘아져나갔다.

 

탄환에 주술적인 처리를 한 일종의 주술탄이었다.

 

선우는 총을 쏘기도 전부터 총구의 궤도를 읽고 피했다. 확장된 인지력과 가속된 사고 속에서 선우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회피동작이 무색하게도 주술탄은 선우가 만든 방어막을 뚫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허공에 작은 금 하나를 새겨 보이지 않는 막의 존재를 알린 것이 주술탄의 마지막 역할이었다.

 

. 이런. 못 뚫었군. 이럴 줄 알았다면 피하지 말걸 그랬어.”

 

내공을 응축시켜 방어막 하나를 만들어뒀다. 그럼에도 굳이 몸을 움직였다. 아까도 봤듯이 탄환에 주술적 처리를 해서 내공으로 만든 방어막을 뚫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탄환이 발사되어 막을 두드리고 있지만, 뚫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내공을 다시 보충해주면 막에 생겼던 작은 금조차 다시 재생된다.

 

사격중지! 모두 가까이서 쑤셔!”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명령을 내렸다. 상대가 주술탄을 막을 수단이 있는 이상, 사격은 아군의 행동범위를 제한하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약탈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응축된 기운을 머금은 병장기들이 흉흉한 기세를 뿌렸다. 충분히 외부에 친 방어막을 갈라버릴 수 있을 만큼.

 

선우도 마찬가지로 무기를 들었다. 검집에 들어간 검 한 자루, 그것이 그의 무기였다.

 

검을 뽑진 않았다. 검집에 넣은 상태로도 충분했고, 굳이 토막 난 시체와 함께 남은 시간동안 여행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목을 노리고 뻗어오는 칼날을 보았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하고 파고들었다. 검 자루를 가볍게 쥐어 횡으로 휘둘렀다.

 

뻐억! 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

 

가장 먼저 달려들던 약탈자의 입이 벌어졌다. 내장이 터지는 듯한 감각이 그의 뇌를 쑤셨다.

 

약탈자 한 명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틈을 비집고 두 번째 공격이 쇄도했다. 일직선으로 들어오는 창날이다. 선우는 몸을 한 바퀴 회전해 창날을 피하며 검집을 휘둘렀다.

 

창날이 선우의 뒤로 지나쳐가는 가운데 묵직한 타격이 그의 무릎과 목을 차례로 때렸다.

 

일격에 무릎이 박살나 몸이 허물어졌고, 이격이 턱과 함께 뇌를 흔들었다.

 

선우의 대처는 간단했다. 피하고, 공격하고, 멀리서 오는 사격은 막고, 그것뿐인데도 막힘이 없었다.

 

마치 짜고 치는 연극처럼 그의 대처는 언제나 완벽했다. 숨소리 한 번 흔들리지 않고서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든 약탈자들의 뼈를 부수고 뇌를 흔들었다.

 

그쯤 되자 슬슬 도망치려는 자들이 생겼다. 선우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같잖은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쏘아졌던 탄환. 찌그러지고 깨졌지만, 여전히 흉기로 쓰기엔 충분하다.

 

선우의 검집이 바닥을 한 번 쓸었다. 역할을 다했던 탄환조각들이 다시금 떠올라 쏘아졌다.

 

자신을 쏘았던 자들과, 그것을 명령한 자들을 향해.

 

퍼버버벅! 주술이 새겨진 쇳조각이 몸에 박혔다. 하지만 죽는 이는 없었다. 선우가 보통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들 또한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들이었으니.

 

이 자식이!”

 

홀로 남은 약탈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지막 돌진을 강행했다.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었음에도 최후의 약탈자는 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동료를 잃었다는 분노와 슬픔이 그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선우는 가만히 서서 그를 맞이했다. 그가 거리를 좁혀오자 선우는 발끝을 가볍게 튕겨 떨어져있던 창대를 올렸다.

 

창을 휘두르기엔 불리한 칸의 구조였지만, 창은 기묘할 정도로 좌석과 충돌하지 않고서 허공에 뜬 채 빙글빙글 회전했다.

 

선우의 초인적인 감각과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허공에서 회전하는 창은 그 자체로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

 

주저 없이 달려들던 약탈자가 급히 발을 굴러 몸을 멈췄다. 그 순간 선우의 검집이 내질러졌다.

 

겁집은 회전하는 창대 사이로 정확하게 파고들어 약탈자의 미간을 짧게 끊어 쳤다.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최후의 약탈자가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선우는 곧바로 검집을 내려 아래로 떨어지는 창날을 받쳤다. 창은 선우의 검집을 받침대 삼아 꼿꼿하게 섰다.

 

바닥에 상처는 없는 게 좋지.”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끝낸 선우가 다시 좌석에 앉았다.

 

-왜애애앵!

 

고양이 소리가 칸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화가 난 건가? 선우가 어리둥절해있자 이윽고 바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격인가 싶어 검 자루에 손을 올리는 와중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약탈자들의 몸이 천천히 꿈틀거리는 살덩이에 삼켜져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먹은...건가?”

 

일단 지하철처럼 쓰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고양이처럼 생긴 생물이다. 지금 딛고 있는 바닥도, 앉은 좌석도, 벽도, 전부 다 그 거대 고양이의 몸이었다.

 

약탈자들의 몸을 삼킨 바닥은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았다. 원래의 부드러운 감촉으로 돌아왔다.

 

과연 삼켜진 약탈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선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고양이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고, 더욱 속도가 붙었다.

 

*

 

그 뒤로도 선우는 몇 번의 전투를 더 치렀다. 고양이 지하철의 칸막이가 일정시간이 지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열리더니 거기서 새 약탈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선우는 그들 모두를 쓰러뜨렸고, 덕분에 아직까지 사지 멀쩡한 채 공백의 생도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슬슬 도착할 때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다시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그 준비가 무색하게도 새로운 목소리가 칸에 울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탐승객 여러분.]

 

평소 지하철을 타며 들었던 것보다 훨씬 맑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먼저, 지금까지 약탈자로부터 본인의 생도증을 지켜내신 예비생도들께 축하의 말씀을 올리며 다음 역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우의 위치로는 보이지 않는 고양이 지하철의 머리가 지금 막 선로 끝의 허공문을 넘었다.

 

게임의 포탈처럼 생긴 허공문은 말 그대로 포탈과 같은 역할을 하기에 허공문을 넘은 뒤 고양이 지하철이 도착한 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현재 저희 고양이 지하철은 환락원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 등선로登仙路를 지나는 중입니다. 탑승객들께서는 양 옆의 창문을 통해 경치를 관람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미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선우는 창문을 통해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하늘?’

 

비행기를 탈 때나 볼 법한 청명한 하늘과 밑에 깔린 구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늘엔 구름뿐만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구조물들 또한 마법처럼 둥실 떠있었다.

 

어떤 것은 탑처럼, 어떤 것은 궁궐처럼 생겼다. 그 사이로 다시 가지각색의 형태를 한 존재들이 보였다.

 

거대 개구리, 거대 황소, 양탄자를 탄 사나이, 쌍두독수리,

 

그리고 자신들처럼 영물교통을 이용하는 다른 놈들도.

 

하늘을 달리는 짐승들의 옆구리엔 난 구멍을 통해 안쪽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란 건가.”

 

환락원. 전 세계의 인재들을 끌어모은다는 명성에 걸맞게 가지각색의 존재들이 하늘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하기 그지없는 환락원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작성자에 의해 2019.10.29 07:16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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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축이는기린 10/29/08:06
연출이 미미합니다. 눈에 띄는 전개, 독특한 세계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작정 비난한다고 생각하실수도 있어요. 근데 이건 기본입니다. 저걸 갖춘 사람들 중, 더 뛰어난 사람들이 라노벨 작가로 삶을 일궈갑니다. 앞으로 3년 이상 투자할 각오가 되셨으면 꿈 꿔도 좋습니다. 결코 1년만에 일어나실 수 없어요. 정말 냉정한 평가입니다. 혹 이도저도 안될 상황이라면 로맨스 소설을 파 보세요.
0 13PE 10/30/07:23
조언 감사드립니다. 말씀해주신 기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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