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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Gm베르[ksd940227]
조회 186    추천 0   덧글 0   트랙백 0 / 2019.10.20 21:59:27

대전 상대가 기권했다고요?”

설아의 황당한 표정에 브랜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때 뭍은 편지봉투를 건넸다.

“4강전 상대인아니, 상대였던 엘리스 양이 남긴 사죄문이다. 직접 말해주긴 조금 그런 내용이라 네게 전해주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어디 봐요.”

봉투를 찢은 설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펼쳤다. 고심하며 쓴 듯 지운 글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글씨들을 빠르게 훑던 설아가 묘하게 굳더니, 이내 선명한 허탈감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왜 안 말해줬는지 알 것 같네요.”

그래. 아무리 무과라고 해도 여자애한테 할 말이 아니니까.”

아뇨. 그게 아녜요.”

설아는 야멸차게 종잇조각들을 내려다봤다.

만약 이걸 제 앞에서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실망하고, 또 화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저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회피했어요. 그래, 무과 3학년으로서의 자존심 같은 거였겠죠. 어떻게 후배에게 그런 굴욕적인 말을 하느냐따위의.”

설아는 바닥에 박아놨던 쌍두검을 뽑아들고 느릿하게 돌아섰다.

금발이 흐드러진 그녀의 뒷모습엔 짙은 그늘이 져있었다.

“‘라그랑제 양의 경기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그녀를 이기지 못 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무차별적인 폭력에 검이 상하는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라니. 웃기지 말라 그래요. 이길 수 있다면 와서 꺾어보란 말예요.”

그래, 겁먹은 거겠지. 그렇지만솔직히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냐. 64강부터 지금까지 대전 상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하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야. 넌 동년배 중에선 압도적이니까. 싸울 엄두가 안 났겠지. 그렇지만 그녀의 행동은 분명 비겁했어. 무엇보다도.”

브랜든은 불안함이 술렁이는 관중석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순간을 망쳐버렸으니까.”

분명 그랬다.

바람의 격을 자유롭게 다루는 최속 노련의 여검사-엘리스 클레이볼트와 불패무쌍의 신예-설아 라그랑제의 대결은 분명 이번 대회의 최고 관심사였다. 지금 관중석에 빼곡히 앉아서, 참을성 있게 경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시선들이 그 증거다.

이대로라면 무왕제의 흑역사로 오랫동안 남게 될 게 뻔했다.

머리가 아프군.’

브랜든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이제 와서 대체할 만한 대전 상대를 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골이 아프구만.’

내뱉지도 않고 담배를 뻑뻑 빠는 브랜든. 뭔가에 계속 고심하고 있었던 터라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흐얽?! 으각! 끄으으으으윽!”

화들짝 놀란 나머지 담배를 떨구고, 혀를 씹은 브랜든은 입가를 움켜쥔 채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 흐히사 힘……?”

사자 갈기처럼 넘긴 은발. 검은 안대가 왼쪽 눈을 가린 자안의 남성. 흑기사 지크프리드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내려왔다. 왜 대전 상대가 도착하지 않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그건…….”

사실대로 말해라. 지금이야 관객들도 단순히 의문을 품는 정도지만, 이 흐름이 유지되면 여론은 순식간에 악화될 거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술렁임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 일이 새어나간다면 학술원의 명성에 해가 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상황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일. 구원의 손을 내민 흑기사를 믿을 수밖에 없다.

결단은 빨랐다.

제기랄, 될 대로 되라지.’

반쯤 탄 담배를 떨구고, 꽉 밟은 브랜든은 품에서 복사본을 꺼냈다.

엘리스의 대기실에서 발견된 편지입니다.”

편지?”

지크프리드는 의문을 표하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덤덤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험악해지고, 마지막 대목에선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못 봐주겠군. 이런 비겁한 놈이 고등부 3년에 있다는 게 말이 되나?”

학원 수뇌부도 당황했습니다. 이렇게 도망칠 거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학생이었으니까요.”

브랜든은 쓴 맛을 삼키듯 표정을 찡그렸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수상쩍은 냄새가 나기도 하고요.”

누군가 개입했다는 말인가?”

지금으로선 직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이지만요.”

지크프리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브랜든은 숨을 고르고, 지크프리드와 시선을 맞췄다.

설아의 4강전 상대가 되어주십시오.”

? 내가 말이냐?”

자신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해하는 지크프리드. 브랜든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리한 부탁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스의 부재를 완벽히 메울 수 있는 자는 지금 당신밖에 없습니다. 명성이나 강함은 말할 것도 없고, 결정적으로 엘리스와 전투 스타일이 흡사합니다. 오늘의 관전 포인트인 힘과 속도의 대결에 완벽히 부합하지요.”

허어.”

지크프리드는 허한 한숨을 내쉬고 브랜든을 채근했다.

그래, 그럼 내가 특별 출전한다고 치자. 그 시간 동안 자네는 뭘 할 텐가?”

브랜든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사람을 풀어 정보를 모을 겁니다. 제자의 결백과 학술원의 긍지를 이 손으로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데?”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신념마저 느껴지는 일거수일투족.

으음……….”

지크프리드는 고심하듯 신음을 흘리더니, 고민한 끝에 설아 쪽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침, 그릇이 궁금하던 참이긴 했지.”

, 그 말은?”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대신 이쪽에서도 조건을 하나 더 걸도록 하겠다.”

무엇입니까?”

지크프리드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걸음을 떼었다.

브랜든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가 툭 던지듯 뇌까렸다.

 

절대 실패하지 마라.”

 

브랜든은 한순간 망연해져서 지크프리드를 돌아봤다.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남자의 등에서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다.

삼십 사년 전.

마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범람하던 시기, 무과의 수준이 날로 높아지던 가운데 붉은 밤이 일어났다.

학술원을 단절 결계로 격리시킨 기사단이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외부로부터 단절되어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학술원생들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아갔다.

사망자 칠십오. 부상자 백 이십사. 실종자 다섯.

그 끔찍한 밤에서 살아남은 영웅으로서.

항전한 끝에 전사한 동료들을 기억하는 친구로서, 그는 경고한 것이다. 그들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할 거라고.

알겠습니다.”

브랜든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크프리드는 희미한 웃음을 띤 채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

불안한 술렁임이 동반된 의문어린 눈빛을 뒤로 한 채, 멀어져가는 설아를 흘끔 보고선 확성 마술을 영창했다. 그리고-

모두 주목!!”

천둥 같은 목소리로 좌중의 소란을 날려버렸다.

설아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벼이삭 같은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림자에 잠긴 채, 서늘하게 빛나며 지크프리드를 바라봤다.

일단 분위기부터 장악한다.’

지크프리드는 목을 가다듬고 청중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을 계속했다.

갑작스럽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제군들! 나는 지크프리드 벤체르 레인즈워스! 알다시피 삼기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지! 내가 여기 선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오늘 있을 4강전의 일정에 생긴 변동사항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웅성임.

많이 불안하고, 궁금하기도 했을 거다! 어째서 경기가 시작되지 않는 건지!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겠다! 4강전 참가 예정이었던 엘리스 클레이볼트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도착하지 않았다! 따라서 설아 라그랑제 선수는 부전승으로 결승에 진출! 예정되어 있던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침묵. 그리고.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집어치워라! 오늘 경기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왔다!

-참가하지 못한다면 장땡이냐! 당장 선수를 끌고 와라!!

 

천둥 같은 비난이 경기장으로 쏟아졌다.

지크프리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이런 분노! 그대들이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증거지!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해! 내가 좌석에 앉아있었다면 당장에 난입해서 한껏 항의했을 거다! 이왕 이야기한 김에 중진들에게 물어보자고!”

지크프리드는 홱 돌아서서 학원 운영진들이 있는 곳을 봤다.

루드비히 이사장! 이 사건에 대한 해결책이 있나?”

소란 속에서 시선들이 몰렸다.

상석에 앉은 백발의 노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지크프리드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내가 엘리스 선수를 대신해 그녀의 상대가 되겠다! 상대로선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레인즈워스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

설아는 무표정을 고수했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학원장만을 바라봤다.

삼기사 급의 대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크프리드는 엘리스와 같은 속도 중심 삼차원 기동전의 달인이 아니던가? 수준이 높아졌을 뿐 관전 쟁점에 큰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만족할 대결, 아니 그 이상을 성립시킬 수 있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폭풍의 눈에 선 이사장은-

한 수 가르쳐주시지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폭발적인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 경기장.

쏟아지는 환희의 중심에 선 지크프리드는 눈을 감고 향수를 곱씹었다.

그립군.’

익숙한 향이 코끝을 맴돌고 있다.

모래바람처럼 메마르고 선혈처럼 비릿한, 무왕제 출전자라면 잊지 못할 내음. 역사라는 이름으로 녹아있는 투쟁의 기억들이 전사의 심장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될 줄이야.’

가볍게 눈을 뜬 지크프리드는 설아를 향해 돌아섰다.

후학을 바라보는 무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네겐 무엇이 느껴지지?’

담담히 선 설아의 머릿칼이 바람에 사락 흔들렸다.

자수정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속마음의 한귀퉁이가 밖에 비쳤다.

이런.’

지크프리드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지금을 감상할 여유가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건가.’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며, 고독을 삼키고 있었다. 카나리아에게 들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늘 싸우고 있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와.

 

소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압도적인 강함과 대면하길 줄곧 갈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 힘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았다. 하여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금욕적인 악순환에서 쌓인 한이 뭉친 끝에마음을 걸어 잠근 걸쇠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크프리드는 설아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힘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지만홀로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고독이 아닌가.’

타인이 대신 짊어져줄 순 없다. 그러나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이라면.

고름을 쏟아낼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지크프리드는 고민했다.

전력을 다한다면,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가 될 것이다. 자존심에 지대한 상처를 입게 되겠지. 그렇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전사로서의 소녀를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난해하군.’

으득.

지크프리드는 답답한 마음에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봤다. 검을 뽑아들고 나섰으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조급한 마음에 휩쓸려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후웅!!

?!”

살벌한 소음을 내며 뭔가가 뺨을 스쳐갔다.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굉음이 울렸다.

숨 막히는 정적 속.

깎여나간 은빛 머리카락이 날리는 가운데, 뺨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고통이 선혈에 섞여 뺨 위로 흘러내렸다.

?’

뺨을 매만진 지크프리드는 손에 배어난 피를 보고 천천히 돌아섰다.

멀찍이 떨어진 그 벽의 가운데엔.

기요틴처럼 거대한 두 칼날이 비대칭적으로 연결된 흉기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지크프리드는 다시금 설아에게 돌아섰다.

……무슨 짓이지?”

보랏빛 눈동자에 적의가 피어올랐다.

실수인가?”

아닙니다.”

그럼……날 죽이려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에 그만 살기가 사라졌다. 지크프리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영문도 모르고 죽을 만큼 원한을 산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원한이야 없지요, 하지만.”

설아는 두 번째 쌍두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지크프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방심하는 자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 건 다름 아닌 지크프리드 당신입니다.”

……….”

정론.

번개 같은 충격이 지크프리드의 전신을 내달렸다. 수치심이라고도 할 만한 감정이 솟구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실례하고 있던 건 내 쪽이었나.’

실로 그러했다.

소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났다곤 하지만, 대전 상대를 두고 한눈을 파는 건 크나큰 모욕이다. 자만을 경계하라고 자주 말한 지크프리드는 절대 보여선 안 될 행동이었다.

지크프리드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다음, 자신의 턱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빠악!

무기질적인 타격음이 울리고. 입에서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지크프리드는 고통에 눈살을 찡그리면서도 한 차례 신음도 흘리지 않고, 그저 입만 한 번 닦은 뒤 설아를 바라봤다.

추태를 보였군.”

스스로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그래,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크프리드는 피가래를 뱉으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원하는 게 있나?”

? 무슨 뜻입니까?”

한 수 배웠으니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한 거다.”

죽일 뻔한 사람에게 그런 소릴 듣는 것도 이상합니다만?”

본분을 망각한 사람은 시체와 다를 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넌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지. , 사양 말고 말해봐라.”

으음…….”

설아는 처음으로 난처한 듯 웃었다. 표정다운 표정을 처음으로 드러낸 그녀에게선 또래 특유의 풋풋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청초하고, 이질적일만큼 아름다웠다.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고 해도…… 보통은 바로 생각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조금 시간을.”

시치미 떼지 마라.”

지크프리드는 하얀 바람을 일으키며 딱 잘라 말했다.

아까부터 원하는 게 있었을 텐데? 내겐 전부 보이니까 구태여 숨기려 노력할 필요 없다. 그저 네 진의를 밝히기만 하면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솔직히, 싸우고 싶잖아?”

확신에 찬 말투. 설아의 표정에 한순간 경직이 스쳤다. 지크프리드는 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널 꺾을 강자와 만나길 줄곧 바래왔을 텐데? 좋은 기회를 두고도 드러내지 않은 건 네가 타인을 상처 입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결코 욕심이 없어서가 아냐. 너무 상냥한 탓에 욕망을 분출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마음만을 죽이고 또 죽이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거다. 내 말이 틀렸나? 가여운 아이 같으니…….”

설아는 불쾌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마치 저에 대해 훤히 꿰고 있다는 듯한 말투네요. 상냥하다느니 뭐라느니…… 저흰 초면이 아니었던가요?”

분명 그렇지. 근데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너와 내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네 현재는 나의 과거고, 내 현재가 네 미래가 될 테니까.”

지크프리드의 전신을 휘감은 하얀 나선이 매섭게 하늘로 퍼져나갔다.

전사의 심장은 서로를 느끼고 공명하기 마련이다. 소녀여. 솔직하게 대답해라.”

지크프리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검지 끝으로 설아를 가리켰다.

네 심장은 지금, 무엇을 위해 뛰고 있지?”

…….

설아는 지크프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움 조금, 밤톨만한 분노 한 조각. 미미하게 피어 뒤섞이는 감정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렇게 혼란함을 느끼는 건 분명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누구에게 들은 것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론 스스로 직관하고 추론해낸 것일 터.’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쌍두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재밌어.’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속마음을 들켰다는 수치심보단, 숨길 수밖에 없었던 진심을 누군가 알아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앞섰다. 마음껏 날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더욱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원래 이 단계에서 보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놈에게도 알리는 게 필연이겠지. 적절한 당근이 되어줄 것이라 믿을 수밖에.

.’

-불렀나?

무쇠를 긁는 듯한 대답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에게만 보이는 환영으로, 가슴에서 흘러나온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목을 휘감기 시작했다.

설아는 눈앞의 지크프리드를 바라봤다.

저 사람 알아?’

-? 갑자기 무슨…….

고개를 슥 쳐든 그림자는 고개를 슥 쳐들었다. 그 순간, 하던 말을 멈추고 이례적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긴 침묵의 끝에, 검은 뱀의 환영은 천천히 타오르는 눈을 치켜떴다.

-………………어이.

어떤 대답보다도 강렬한 확신을 심어주는 음성.

그 목소리에 담긴 끔찍한 살기에 오한이 돋아났다. 설아는 전율하는 한편으로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래, 맞아. 저 사람이 네가 그렇게나 찾아 헤맸던 원수. 흑기사……[지크프리드].’

-내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저 자식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폭주할 듯 송곳니를 드러내는 환영. 가빠지는 심장박동. 설아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래, 네 마음 잘 아니까 당장 힘을 넘겨. 복수로 향하는 첫 걸음을 오늘 내딛는다.’

-? 무슨 소리냐. 이건 계약과 다르지 않나?

뭐가?’

-시치미 떼지 마라. 넌 분명 놈들을 죽이는 건 내 손에 맡긴다고 했을 터인데?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진 않겠지?!

설마, 하며 살벌한 기운을 흘리는 환영에게 설아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지금 저 사내를 죽일 리가 없잖아. 흑기사는 아직 필요한 사람이야. 이 단계에서 죽여도 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럼 내가 힘을 넘길 이유가 없다만?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널 도울 이유가 어디 있나?

미래를 대비한 모의전에 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림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설명할 가치도 없다. 완전융화한 용인과 범부 사이에 어떤 격차가 있는지 모르는 거냐? 모의전 따위 거칠 필요도 없어!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패착은 결딴난단 말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당연한 거다. 그럼 넌 내 힘을 얻은 네가 저 사내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나?

과시하는 듯한 질문에 잠깐 침묵한 설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백 번 싸워서 한 번이라도 이긴다면 기적이겠지.’

-, 뭐라……?!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는 그림자. 설아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가볍게 말했다.

타고난 절대자인 용종에겐 우습게 보이겠지만, 그와 나 사이엔 신체 능력으론 못 메우는 격의 차가 존재하니까. 넌 인간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웃기!

‘-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봤어? 완전 융화 상태가 아니었다곤 해도 넌 이미 저 사람에게 완패했잖아. 누구보다도 저 자를 경계해야할 네가 그렇게 행동하다니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는데.’

-………………….

다분히 냉혹한 평가에 그림자는 말이 없어졌다.

성격대로라면 당장에 웃기지 말라며 신체 소유권을 강탈하려고 달려들었을 텐데. 답지 않게 침묵을 고수하며 지크프리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아의 말대로, 당해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지크프리드라는 사내의 강함과, 종족의 격차조차 뒤엎을지 모르는 기술의 존재를. 설아는 남몰래 웃음을 삼키며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럼 이야기는 대충 끝난 것 같네. 슬슬 가보자고.’

손톱에 박힌 붉은 살점.

결합에 바쳐질 선혈이, 고여 있던 손아귀에서 풀려 바닥에 흘러내렸다. 상황을 파악한 그림자가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질렀다.

-, 잠깐 기다려!

안 기다려.’

설아는 단호하게 말하며 그의 힘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찢어지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집행이라 불편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렇게 끌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심장이 무엇을 바라냐고 물었던가…….’

답이 하나 외에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군청색의 나선.

그 가운데 선 설아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지크프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패배가 뭔지 알려주세요.”

-쿠쿠쿠쿠쿠쿠쿠쿠쿵!!!

세상의 마지막 황혼처럼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카락. 제비꽃을 연상시키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스산한 금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검은 전의戰意의 폭풍은 시야를 집어삼키며 거칠게 확산해갔다.

지크프리드가 삼켜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건………!!”

지크프리드는 세계의 격변에 눈을 치켜떴다.

어느새 세계는 어둠에 저물었고, 검은 벽으로 보이는 윤곽에 둘러싸여 있었다.

황급히 일대 마력에 간섭해 파란을 막고자 했지만 대처가 늦었던 걸까? 이미 소녀에게 굴복한 마나는 위협에 달아나긴커녕, 뭔가에 쫓기듯 맹목적으로 지크프리드를 둘러싸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살기殺氣……!! 살기로 일대의 마나를 지배한 건가!!’

소녀가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은 지크프리드는 등골을 스치는 서늘함에 부르르 떨었다. 그 이유야 당연하게도, 소녀가 제련해낼 수 있는 적의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옥처럼 깊고 격렬하며.

빙하처럼 차갑고 굳건하다.

참혹한 전장에 절망한 패잔병 혹은 전귀가 이런 살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아니다. 이건 그런 차원의 수준이 아니다.

단순한 원념이 아냐. 이 잔향은 분명!’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맡았던 그 비린내. 눅진한 썩은내.

죽음의 냄새가 살기 속에 가득했다. 어디선가 딸각거리는 소리가 나서 시선을 돌리자, 식은땀에 젖어 떠는 오른손이 보였다. 불쾌한 잡음의 정체는 칼날이 땅의 모래에 스치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설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을 겪었던 거냐……!!”

글쎄요.”

설아는 싱긋 웃고 있었다.

남에게 말해줄만 한 건 아니라서.”

-쿠웅……!!

살기가 짙어졌다. 둔중한 소음이 공기를 밀어냈는지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중압감의 가운데, 일대를 고무시키는 소녀의 뒤에서 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크프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고정시켰다.

사라졌다?’

한 순간 그림자가 신기루처럼 옅어졌다. 사라졌나 싶어 미간을 좁히고 있었는데단적으로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지크프리드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를 악 물며 주변을 확 둘러봤다. 직감이었던 공포는 확신으로 변했다.

숨통을 조아오듯 농밀해지는 살기의 정체.

검은 윤곽으로만 보이던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인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지크프리드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일대를 감싸고 있는 검은 윤곽그건벽이 아니라…….’

검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크프리드는 마주했다.

자신을 감싸는 똬리를 틀고 앉은, 거룡의 황금색 눈동자를. 지크프리드는 눈앞에서 으르렁대는 시커먼 송곳니를 보며 송연하게 웃었다.

이거야 원…….”

나는, 까마득한 후학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건가.

유감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숨결을 뿜던 거룡은 온데간데없고, 금빛 눈동자를 빛내는 절세의 소녀가 미소를 내비치고 있었다.

역시 환영이었나. 이래선 체면이 안 서는군. 제기랄.”

지크프리드는 소탈하게 웃으며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진한 보랏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렇게 나온다면야…… 이쪽에서도 봐주지 않겠다.’

조금 꼴사나울지 몰라도 이게 옳다.

지크프리드는 눈앞의 소녀를 더 이상 가르치는 상대로 보지 않기로 했다. 허공에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 패배가 뭔지 알게 해 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설아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누가 후회하게 될 지는 대 봐야 알겠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지크프리드의 맹우가 현현했다.

은빛 도끼날을 거느린 미늘창Harbert를 강하게 낚아채며, 지크프리드는 딛고 선 땅을 강하게 짓밟았다.

“[질풍이여]!!”

지크프리드는 하얀 칼바람을 두르고 쇄도했다.

!”

설아는 뒤돌아서며 쌍두검을 뽑아서, 그대로 회전해 지크프리드의 일격을 막아냈다.

살벌하게 울리는 파공음.

거리를 벌리고 다시금 대치한 둘의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렸다. 허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으니.

칼끝이 흔들림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하앗!!”

설아는 하단으로 파고들어 풍차를 연상시키는 칼날을 휘둘렀다.

지크프리드는 받아치는 척 가볍게 틀어 공격을 흘린 다음. 노련하게 비틀어서 칼자루까지 도끼날을 밀어붙였다.

쓸데없이 동작이 크다! 그리고 물러!”

지크프리드의 등에 새하얀 바람의 날개가 펼쳐졌다. 본디 존재하는 완력의 격차를 등을 떠미는 돌개바람이 메우기 시작했다.

기울기 시작하는 균형추.

제길!’

혀를 찬 설아는 칼날을 위로 쳐올리고 뒤로 크게 도약했다. 거리를 벌려 숨을 고를 참이었다. 주도권을 내주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늑대가 한 번 문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어딜 가느냐!”

질풍을 타고 순식간에 따라온 지크프리드는, 파도를 타듯 도약하여 설아의 배후를 점했다. 그가 움켜쥔 도끼창의 날에 새하얀 질풍이 휘감기기 시작했다.

이런!”

“[질풍각: 연무演舞]!”

-쉬이이이익!!

설아의 시야가 하얀 빛줄기들에 휩싸이고, 폭풍 그 자체가 된 지크프리드가 사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따라잡기조차 버거운 신속.

칼날이 스칠 때마다 한기가 스며든다.

설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재생력을 높이고 보이지 않게 용린을 피부에 두르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이미 끔찍한 몰골이 되어버렸겠지.

실질적인 저항은 꿈도 못 꾸는 상황, 일텐데.

설아는 처음으로 마주한 궁지에 벅차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선혈과 살점이 흩날리는 와중에 소름끼치는 흉소가 그녀의 입가에 피었다.

즐겁다.

가슴이 옥죄이고, 숨이 막히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느낌. 본격적으로 살아있다는 걸 확신시켜주는 고동.

이게 지크프리드가 말한 전사의 심장이라면, 이 맥박이 투쟁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명하는 것이라면. 재회한 도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에게 그 이상의 행복은 없으리라.

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무릎 꿇을 순 없었다. 설아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마시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읍………!!”

하얀 연기 같은 뭔가가 그녀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점 빛도 없는 그녀의 세계가 어둠 위에 재구축되기 시작했다. 용종 특유의 호흡을 사용해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선과 선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포착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단 하나의 존재를 기다렸다.

오른쪽 어깻죽지에 칼날이 스친 순간.

‘-온다!’

위쪽에서 전조도 없이 살기가 피어났다. 눈을 치켜뜬 설아는 득달같이 돌아서며 손을 뻗었다. 이미 눈앞까지 닥쳐온 도끼날을 강하게잡았다.

잡았다!”

?!”

날이 파고든 손아귀가 칼날에 찢어지고 피가 흩날렸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텐데, 설아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웃었다. 되려 경악한 건 지크프리드 쪽이었다.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근육을 완전히 찢어버린 건가.

손아귀가 심하게 다치면 검을 다룰 수 없어진다.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젠장!”

-그런 걱정과 함께, 미친 듯이 웃고만 있는 소녀에 대한 공포가 솟아났다. 저렇게 도끼날을 쥐고 무엇을 할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으랏차아아아아아!!”

대답 대신에 포효한 설아가 핼버드를 휘둘러지크프리드를 땅에 메다꽂았다.

이건, 위험하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기묘한 감각.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지크프리드는 돌개바람을 일으켜 자신과 그녀를 옆으로 날려버렸다. 설아는 멀리 날아가 벽에 성대하게 부딪혔다.

낙법을 취한 지크프리드는 땅을 짚고 박살난 벽을 바라봤다. 핼버드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스미고 있었다.

만만치 않군.’

지크프리드는 소녀가 무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후우…….”

부연 모래먼지 속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어 난데없이 몰아친 바람에 먼지가 쓸려가고 그 가운데서 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덜미가 뻐근한 듯 어루만지는 그녀의 몸엔- 단 하나의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선혈 자국만이 흐르다 말고 눌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금빛 눈동자를 살포시 뜨더니, 지크프리드를 보며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아프네요.”

그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말해서야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지크프리드는 핼버드의 피를 털어내며 대꾸했다.

아니죠. 당신이 할 말은 그런 게 아니죠.”

설아는 지크프리드를 가리키며 나긋히 입을 열었다.

왜 급소는 공격하지 않았나요?”

무슨 말이지?”

모르는 척 한다, 이건가요?”

설아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아까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제겐 전부 보입니다. 당신은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듯 보이면서도, 머리나 장기가 있는 쪽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어요. 오직 다리와 팔만을 집요하게 공격했죠. 마치 절 무력화시키려는 것처럼.”

지크프리드는 침묵했다.

짧았지만, 설아가 그 뜻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딴에는 분명 진심으로 가겠노라 결심하였지만,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자비심이 무의식 중에 그것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일까. 본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로서도 마찬가지였다.

.”

설아는 신랄하게 혀를 찼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듯 입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살스럽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말보다도 더욱 웅변적으로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지크프리드는 희미하게 눈을 빛냈다.

금안이 된 다음부턴 뭔가 다른 것에 씐 듯 성격이 거칠어졌다. 조종당한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의문을 품을수록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 지금 생각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할 뿐.’

핼버드를 크게 휘두른 지크프리드는, 창의 끝을 내리며 설아를 바라봤다.

사담이 길어졌군. 무기를 들어라.”

약조부터 해주십시오. 진심으로 싸우시겠다고.”

그건.”

지크프리드는 창대를 강하게 쥐며 대꾸했다.

천천히 강도를 올리는 정도로 타협하마.”

, 그래요?”

설아는 허공으로 손을 뻗어 벽에 방치해뒀던 쌍두검을 불러들이며 표정을 지웠다.

그럼 죽어야지.”

무감정한 말을 던지며.

힘차게 도움닫기하며 불러들인 쌍두검을 지크프리드에게 내던졌다. 동시에 나머지 쌍두검을 들고 땅을 박차 질주하기 시작했다.

허공을 찢으며, 땅을 내달리며 쇄도하는 두 갈래의 죽음.

확실히 위협적인 공격이다.”

지크프리드의 주변을 떠도는 공기가 한 층 싸늘해졌다. 칼날 같은 바람줄기가 하나씩, 하나씩 늘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내가 말했지.”

여기까지 흐른 시간은 2초 가량.

지크프리드는 핼버드를 강하게 올려쳐 쌍두검을 튕겨냈다. 하늘로 솟구치는 검, 보름달을 그리듯 회전한 은빛 핼버드.

네 공격은 너무 단조롭다고.”

질풍을 다리에 휘감고 지크프리드는 달려 나갔다. 얼음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 신속을 돒파한 그는 그녀가 인식하지 못한 찰나로 파고들어, 순식간에 검격이 닿는 위치를 점했다.

그리고 핼버드를 강하게 휘둘렀다.

쩌엉-!!

?!”

설아는 신음하며 눈을 치켜떴다. 알아채지 못하는 찰나에 눈앞에 다가왔으니 그럴 수밖에.

맞댄 칼날을 사이에 둔 채, 지크프리드는 입술만 움직였다.

첫 번째 조언이다. 절대 흥분하지 마라. 감정의 고조는 공격을 무디게 한다.”

!!”

설아는 이를 악 물며 검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건 악수가 되었다. 지크프리드가 도끼날을 비틀며 살짝 돌아서자 자신의 힘을 못 견디고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이어서,

!”

지크프리드는 왼발을 축 삼아 발을 흩뿌렸고, 채찍 같은 뒤후리기가 설아의 안면에 쇄도했다.

!”

오른팔로 얼굴을 가드했지만, 뒤로 성대하게 날아갔다. 확연하게 달라진 적의. 공격의 날카로웁에 식은땀이 흘렀다. 설아는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가볍게 제비를 뛰어 후방 도약했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한다!’

순식간에 벌어진 피아의 간격. 그러나,

부족해.”

지크프리드는 질풍을 타고 가볍게 추적해오더니,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내게서 도망치려거든 성도 밖으로 나갔어야지.”

시끄러워!”

쩌엉-!!

산성을 울리며 맞부딪힌 칼날과 도끼날이 하늘에 춤추고, 서로를 아득히 날려버렸다.

경기장 양 끝까지 날아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포탄처럼 서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압!”

으랴!”

경기장 중앙에서 격돌한 두 사람.

질풍의 날개를 등진 지크프리드와, 설아의 시선이 교차한 칼날 위로 겹쳐졌다.

강단 하나는 볼만하구나?”

도망치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그런 성격이 싫진 않다. 허나 때로는 도망치는 게 선책일 때도 있는 법.”

둘의 칼날이 몇 번이고 떨어졌다가 다시 맞부딪혔다. 은빛과 칠흑이 번뜩이고, 불꽃이 튄다.

찰나가 스칠 때마다 수십 번의 살기가 격돌했다. 두 검의 공명이 자아내는 충격에 지면이 패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가르침이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땐 일단 도망쳐라’!”

시끄러워!!”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코앞에서 듣는다면, 부아가 치밀지 않을 리가 없다.

도망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지,”

다시 한 번 칼날이 격돌했다.

고질적인 힘겨루기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설아는 전신의 혈류와 근육을 한계까지 가열-고조시키며 검을 밀어붙이고서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니란 말야!”

검을 놓았다.

?!”

무게 중심의 붕괴. 경악하는 신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지크프리드는 균형이 무너진 채 설아의 곁으로 스쳐가고 있었다.

놓치지 않아!!”

설아는 손을 뻗어 지크프리드의 오른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어깨를 지렛대 삼아 땅으로 강하게 패대기쳤다!!

지크프리드는 기묘한 부유감에 휩싸였다. 세계 전체가 반전되고, 지면이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그리고 그건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위험하군.’

설마하니 같은 방식으로 당할 줄은 몰랐지만.

대처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지크프리드는 자신을 감싼 질풍들에 마력을 불어넣어 거대한 날개 두 쌍을 생성했다.

바람이여!”

등과 지면이 격돌하기 직전, 날개를 강하게 펼쳐 돌풍을 일으켰다. 강력한 돌개바람이 그의 등을 받쳐주었다. 아니, 받쳐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힘의 균형추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크윽!”

소녀의 금발이 바람에 실려 사납게 춤추었다. 금빛 눈동자를 치켜뜨며 오른손을 뻗는 것은, 검을 불러들여 내리찍으려는 것이겠지.

놔둘까보냐!’

지크프리드는 뒤로 구르듯 하반신을 말아 올린 뒤, 질풍을 추진력 삼아 발차기를 날렸다. 파성추처럼 묵직한 일격이었다.

!”

설아는 지크프리드를 뿌리치고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군화의 각진 모서리가 스친 뺨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치잇!”

설아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양손을 허공에 뻗어 흩어진 두 칼날을 불러들였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그것마저 실패하다니!!’

정비할 시간도, 실력 차를 메울 계책을 세울 시간도, 모든 준비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언뜻 보기엔 호승부라 할 만한 접전이 이어지는 것 같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녀는 시종일관, 심지어 지크프리드가 봐주고 있을 때마저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지크프리드의 공격은 수차례 설아에게 닿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설아의 공격 중 지크프리드에게 닿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슴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의 사고는, 찰나를 수십 번 쪼갠 일부마다 채워 넣는 전투의 열광 그 자체였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느끼는 시간이란 극도로 짧은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 이번엔 무슨 수를 쓸 거냐.

어떻게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거지? 오만하다고 해도 좋을 사고를 거치며 설아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동시에.

 

-커헉……?!

강철의 습격을 마주했다.

반응이 굼뜨다!!”

칼날을 손에 잡기도 전에, 하늘에서 활강한 지크프리드가 그녀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무기를 잡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깝죽대지!”

고통을 삼킨 설아는 그를 움켜잡고서 밑으로 내리찍으려 했다. 힘겨루기라면 절대 밀리지 않으니까. 질풍만 걷어낼 수 있다면 내 승리다!

-라고 생각하며, 발을 고정쇠 처럼 땅에 쑤셔 넣으려 하겠지.

그게 네 한계다!’

지크프리드는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으며 외쳤다.

네놈의 강함을 인정하마! 견습생을 가르치며 이 전법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니 영광으로 여겨라!”

헛소리 집어!”

그녀의 앙칼진 대답은 폭풍의 바람소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지크프리드의 등에 다시금 날개가 펼쳐졌다. 아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보기에도 차이가 완연할 만큼 커졌다는 것과, 세 쌍의 날개가 더 생겨났다는 것.

가자!”

여덟 쌍, 신화에나 나올 법한 신령의 날개를 펼친 지크프리드가 하늘로 맹렬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구름과 안개, 기권에 몰아치는 기류조차도 찢으며 솟구쳤다. 지면이 아득해질 때쯤에야 지크프리드가 팔을 풀었다.

이 개자식이!”

설아는 그를 걷어차고 허공에 몸을 맡겼다. 양손을 다시 뻗자 저 멀리서 풍차 같은 칼날 한 쌍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쇄도하는 게 보였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고공 낙하하는 가운데, 핼버드를 고쳐잡은 지크프리드가 즐거운 듯 외쳤다.

조금 더 강하게 갈 테니, 전력으로 견뎌봐라!”

깝죽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칼날을 움켜쥔 설아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지크프리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맹수처럼 상반신을 웅크렸다. 설아 또한 검을 낚아채며 충격에 대비했다.

흐읍!”

지크프리드는, 한순간에 허공을 박차고 달려왔다.

갑주를 스치며 찢어지는 바람들. 순식간에 피아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5미터에 도달한 시점에서 지크프리드가 한 단계 더 가속해 설아에게 짓쳐들었다.

채앵-!

뻣속까지 얼리는 서늘한 산성.

설아는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지크프리드는 추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격돌하고 밀려나고, 다시금 격돌했다. 공중에서 불꽃 튀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상황이 좋지 않다!’

설아는 시선을 흘끔 돌려 지면을 바라봤다. 좁쌀만 하던 건물들이 윤곽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패배 확정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은 간단히 떠올랐다. 어떻게든 유효타를 먹여서 흐름을 휘어잡아야 한다.

뒷일이야 팔 하나를 희생해서 낙하 충격을 받아치면 어떻게든 되리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흐름을 끌어오지?

고민하는 설아의 뇌리에 뭔가가 퍼뜩 스쳤다.

카운터.

설아가 그의 공격을 강하게 튕겨냈을 때, 잠깐이지만 그는 균형감각을 잃었었다. 지면에서 그랬으니 훨씬 불안정한 하늘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설아는 지크프리드를 노려보았다.

너도 뭔가 노리는 게 있겠지.’

아까부터 단조로운 공격만 반복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빈틈을 찾으려는 것일까.

설아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반복되는 찰나 동안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승부수를 던진다!

이어진 공격을 받아쳤다.

그리고 설아는 구태여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 검을 반동에 맡기며 빈틈을 드러냈다. 승리를 낚아채기 위한 건곤일척의 도박.

……!”

지크프리드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가 활시위처럼 휘더니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달려왔다. 미끼를 문 것이다!

먹어라!!’

설아는 허리를 억지로 비틀어 힘을 만들어서, 전방에 써머솔트 킥을 날렸다.

말했잖나.”

그러나 지크프리드는 그녀를 비웃듯이.

다 보인다고.”

격돌의 직전에 속삭였다.

?!”

달려오던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지크프리드로 보이던 환영은 스산하게 갈라져서 그녀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허공을 휘젓는 발차기.

설아의 금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설아 앞에 지크프리드가 나타났다. 태양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위압적으로 찍어 눌렀다.

!”

체중을 실은 장타가 설아의 흉갑을 강타했다.

, 하읏……!”

눈앞이 번쩍였다. 설아가 하얀 동공을 드러내며 나가떨어졌다.

전력으로 와 달라고 했었지.”

지크프리드는 멀어지는 소녀를 비정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핼버드를 쥔 손이 꽈득, 소리를 내었다.

소원대로 해주마.”

그는 몸을 수그리더니, 질풍을 박차고 땅으로 내달렸다.

유성처럼 천공을 양단한 흑기사.

스으으으읍!”

순식간에 설아를 따라잡은 그는, 심장 주변 마력을 자극시켜서 흐름을 멈추었다.

그러자 의식이 망치에 맞은 듯 뒤흔들리고- 세계가 순식간에 회색으로 물들었다.

지독하게 마술에 조예가 없는 그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기적, 이공간 도약.

 

찰나의 틈새에서 그가 춤추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하이킥.

왼쪽 관자놀이에 하이킥.

등 뒤로 이동해서 목덜미에 내려찍기.

 

완벽히 동시에 들어간 세 번의 정타. 겹쳐진 파공음이 하늘에 울렸다. 설아는 감전된 듯 꿈틀 경련하더니, 내려찍힌 충격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끝났군.’

승리를 확신한 지크프리드는 질풍의 날개를 펼쳐 땅으로 활강했다.

풍경들을 흘려보낸 지 수 초 만에 지면에 닿았다.

마지막이다.’

날개를 펄럭여 착지한 지크프리드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하늘을 향해 돌아섰다.

파괴자의 날개여!”

-쿠구구구구!!

일대에 하얀 바람들이 태동하더니, 경기장을 휘감듯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지금 나의 오른편에 깃들어서!”

날개가 사라졌다. 소용돌이치던 바람들이 그의 다리로 휘감기듯 모여들었다.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도 버거운 힘이, 폭풍이라는 재앙이 그의 오른쪽 다리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지크프리드는 왼쪽 다리를 축 삼아 뒤돌았다. 그리고,

적대자를 격멸하라!!!”

때맞춰 떨어진 설아를 향해 오른발을 후렸다.

-!

발이 복부를 강타한 순간, 폭음을 실은 사나운 바람이 경기장을 휩쓸며 퍼져나갔다.

설아가 거인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지크프리드가 폭사한 바람이 용처럼 승천하며, 그녀를 집어삼키고서 하늘 끝까지 휘몰아쳤다.

승부를 끝내는 일격이었다.

 

-후웅…….

 

바람이 떠난 자리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솟구쳤던 설아가 힘없이 떨어지고, 지크프리드가 천천히 발을 내릴 때까지 일대에 내린 침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쓰러진 설아의 침묵과 고통이 바람을 통해 전염된 것처럼, 관중들은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도 승자를 칭송하지 않고.

일어나라고 속삭이듯이, 말없이 패자를 응시하였다.

어쩌면 마지막만을 본 그들로서는 이 결과가 납득키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바란 것은 노장과 영걸의 숨 막히는 접전이었을 테니.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외면하고 있던 실력의 격차가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미안하게 됐군.’

지크프리드는 담담히 설아를 바라봤다.

대등하게 겨루기엔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이것도 선전한 거지.’

대기 중이던 의술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각한 것 아니냐, 당장 조치가 필요하다 등등의, 소녀를 걱정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지크프리드가 보기엔 괜한 걱정이었다. 소녀의 괴물 같은 재생력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사흘 정도면 회복할 것이다. -마지막 공격이 조금 과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왜 그랬을까?’

미간을 살짝 좁힌 지크프리드는, 자신이 이리도 변덕쟁이었나 하고 고민했다. 처음 소녀를 상대할 땐 분명 힘 조절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인지 봐줘야겠다는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

도발을 당해서 그런 걸까,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조금 더 깊은 적의. 오랜 악연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쓰러트려야만 하는 이를 마주했다는 감이 표면 의식에 떠올랐다고 말하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까.”

지크프리드는 생각을 멈추었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피해가자고 마음먹고, 가볍게 돌아섰다. 칭송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

--.

의식이 부상했다.

눈을 뜬 설아를 반겨준 것은, 그리운 이의 눈빛처럼 새카만 밤하늘이었다. 몽롱함을 떨쳐내는 그녀는 손을 눈앞에 가져와서, 뭔가를 확인하듯이 쥐락펴락했다.

이곳은.’

설아는 한숨을 쉬었다.

녀석의 세계구나.’

[그래.]

그녀의 생각에 누군가 긍정했다. 설아는 천천히 일어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태산처럼 거대해 끝이 보이지 않는 육신과 날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용의 그림자가, 금빛으로 불타는 눈을 치켜떴다.

[멍청하게 패배한 누구씨의 친구가 사는 곳이지.]

패배해?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건가? 네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설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나지 않는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쓰자,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그제야 하나씩, 아주 천천히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복부를 휩쓰는 환상통에 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되었나.”

[그래 멍청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강제 계약이나 하더니, 상대도 안 되게 밟히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거룡은 불쾌한 듯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넌 영민한 녀석이니 무턱대고 나서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은 거고. 그런데 이젠 기다릴 이유가 없어졌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이제 내 차례라는 거다.]

거룡의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어,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몸의 주권을 넘겨. 용인의 전투가 뭔지 보고 배우라고.]

거절하겠다면?”

[강제로 빼앗을 수밖에 없겠지.]

그것도 거절하겠다면?”

설아의 눈빛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내가 진심으로 저항해도 주권을 강탈해올 수 있다고 생각해?”

[무리겠지.]

잘 아네. 애초에 내가 널 안 내보낸 이유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거든? 네가 몸을 사용한다고 치면, 용언이나 숨결 같은 거 안 쓸 자신 있어? 육탄전만으로 놈을 꺾을 자신이 있냐고.”

[힘들겠지.]

거룡은 순순히 대답했다. 수상쩍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째서인지 서늘하게 웃던 그는, 설아를 바라보며 눈을 휘어트렸다.

[그러니까- 강제로 받아가겠다.]

쿠웅……!!!

순백의 평원이 울기 시작했다. 천천히 강해지는 진동이 세계를 삼키려는 듯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붕괴음과, 괴이하게 불어드는 바람.

[네 무례에 대한 복수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

가만히 서서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설아가 천천히 먼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담담하게 부서져가는 손끝을 바라봤다.

강제 계약, 이구나.”

[그래. 네가 흘린 피가 많아서 한결 수월했다. 구태여 자해할 필요가 없으니 좋더군, , 그런 건 제쳐두고. 지금 기분이 어떻지?]

왜 그런 질문을?”

거룡은 심술궂은 웃음을 흘리었다.

[내가 느꼈던 분노를 너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거든.]

그렇구나. 그런 걸 기대했다면 미안하게 됐는걸. 왜냐면-”

설아는 거룡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싸늘한 한기마저 흩뿌리는 보랏빛 눈동자는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얼어버린 감정들을 꽁꽁 숨겼다. 눈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까.

설아는 천천히 왼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네 계획은 실패했거든.]

무너지는 세계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진동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무너지던 밤하늘이 역재생하듯 모여들어 원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건!?]

당황하는 거룡.

설아는 미소를 싹 지우고 말했다.

우습게보지 마. 난 십이 년 동안 네 힘을 억누르는 방법만을 찾은 사람이야. 그런 내가, 네가 강제 계약을 이행할 상황에 대비를 안 해놨을 거라고 생각했어?”

[, 네놈이……!!]

입 닥쳐.”

그녀가 으르렁대자, 무겁고 짙은 어둠이 일어서던 거룡을 찍어눌렀다. 용종에 어울리는 초월적인 괴력으로 벗어나고 발악했지만, 아무리 땅을 찢어발기고 날개를 펼쳐도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고스란히 억압된 분노가 포효로 터져나왔다.

[네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옴-----!!!!!!!!]

닥치라고 했지?”

설아는 차갑게 내뱉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려 들면 그땐 더 쓴 맛을 보게 될 거야. 그러니까……조금 기다려주길 바래.”

언젠간 반드시, 네가 날뛸 기회를 마련해줄 테니까.

지금은 내 싸움을 지켜봐. 이건 명령이야.”

[웃기지 마라! 어차피 거짓말일 텐데 믿을 필요가 있을 리가 없지!]

꼴사납게 조아리는 자세로 거룡은 으르렁거렸다.

[역겨운 미생 같으니라고! 증오스럽다! 어쩌면 그리도, 그리도 끔찍하게 이기적일 수 있단 말이냐!! 내 언젠가 반드시 네놈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이이이이이이이!!]

웃기는 말을 하네.”

허공에 손짓을 하자, 어둠이 모여들어 낫의 형상을 이루었다.

조소한 설아는, 아예 거룡을 등지고 돌아섰다. 미련이 남은 것처럼 흘긋 뒤돌아본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랑은 원래 이기적인 거야.”

설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림자 대낫이 날뛰어 그녀의 목을 날려버렸다. 동시에 세계가 하얀 빛으로 휩싸여서 진정한 끝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콰릉!!

파각을 뒤로 하고.

영원한 찰나의 세계에서 벗어난 의식은 천천히 부상했다. 심연에서 수면으로 다가가는 듯한 부양감.

오감과 함께 도래하는 서늘한 고통을 음미하며, 설아는 눈을 감았다.

짧고도 긴 기다림의 끝에 그는 마침내.

갈망하던 전장으로 돌아왔다.

 


작성자에 의해 2019.10.21 04:54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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