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추천   / 글 번호 578414   
  허공 말뚝이 3권 평
  4 청아비[jangwongi]
조회 446    추천 0   덧글 1   트랙백 0 / 2019.09.17 10:26:20
1. 서문

15년간 완결나지 않았던 갑각나비를 후딱 완결시킨 오트슨 작가가 6년만에 낸 미얄 시리즈 후속권입니다. 미얄 시리즈가 시드노벨에서 최초로 나왔던 세 라이트 노벨 중 하나라는 걸 생각하면 이게 한국 라이트 노벨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저에게도 원점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본 라이트 노벨이 이거였고 처음으로 산 책도 이거, 처음으로 리뷰를 쓴 책도 미얄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6년만에 후속권이 나오니 지난 권 내용이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인상적인 장면 몇 개는 기억나요. 하지만 허공 말뚝이 1권(상, 하)보다도 허공 말뚝이 2권(상, 하) 내용이 기억이 안 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읽으면서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래 오트슨은 이런 작가였다. 미얄 시리즈는 이런 작품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이 작품은 내가 처음으로 봐서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그냥 재밌는 작품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공 말뚝이 2권은 작가의 취향이 가득 들어가 있는 작품이고 진정 작가의 인생작이라고 할 만 합니다.

지금 보니까 허공 말뚝이 2권이 좀 웃기긴 합니다 ♡♡ 왜냐면 2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랑 검사장이 등장하는데 그 사이 한국 대통령은 탄핵됐고 ♡♡♡ 지금은 검찰개혁 문제로 정쟁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뭐 그 외에도 허공 말뚝이에서 묘사되는 대한민국의 천재 과학자 및 비밀 연구조직 같은 것도 한국 학계나 대학원의 현실을 알게 된 지금 나이에서는 묘하게 보이고...... 한국 첩보조직은 대통령 찬양글을 쓰면서 전직 대통령 얼굴에 동물이나 합성하고 있었고...... 

뭐 그래서 3권은 어땠냐면.


2. 개괄적인 평가

졸작입니다. 그래도 왜 졸작인지 설명을 해야겠죠.

허공 말뚝이 3권은 앞서 나온 1, 2권에 비하면 분량이 2/5쯤 됩니다. 원래 허공 말뚝이가 한 권당 글씨 폰트도 작고 분량도 2배라 평범한 라이트 노벨(예시: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분량의 2.5배쯤 되는 텍스트를 담고 있는데요. 근데 상하권 구성이니까 따지자면 허공 말뚝이 1, 2 하나당 라노벨 5권 분량의 텍스트가 들어가 있는 거죠. 둘을 합치면 10권 분량이고 7권까지밖에 나오지 않은 본편 텍스트를 능가합니다. (단순 계산이라서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네요)

그래서, 이 허공 말뚝이 3권 역시 분량이 얇아보이긴 합니다만 평범한 라이트 노벨의 1.5배 정도의 텍스트는 들어가 있어요. 그렇지만 전 이 책이 엄청나게 얇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허공 말뚝이 3권의 내용은 허공 1,2권에 비해서 절대 이야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많은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그 많은 내용이 이 한 권에 압축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갑각나비 리뷰 때 했던 말을 그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스토리를 진전시키는데에만 급급한 책입다. 복선이 없지는 않았던 새로운 인물 등장. 갑자기 감춰져 있던 주제 드러내고, 진실 드러내고, 반전 드러내고, 인물들 성장시키고 인물들 비밀 길게 공을 들이는 대신 그냥 휙 던져버리고,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되는지만 설명하고 하나 끝내면 하나 나오는 식으로 후딱후딱 진행해서 원래라면 지금 분량의 2.5배쯤 되는 텍스트를 압축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러면 안 됐습니다. 3권에 등장한 신규 인물. 복선이 있었으니 갑툭튀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이렇게 적은 텍스트를 할애해서 설명할 인물이었나요? 허공 말뚝이 1권도 2권도 상하권 전체에서 인물 한둘만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이었잖아요? 3권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1권에서 주인공, 2권에서 최종보스를 조명했으니 3권에서 흑막을 조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등장인물들의 대화조차도 퇴화해서 제가 미얄 시리즈를 읽고 있는지 그냥 웹소설을 읽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미얄 시리즈는 그냥 이야기 돌아가는 것만 보기 위한 글이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작품이었단 말이죠. 이야기가, 반전이 충격적이었던 건 그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문장 때문이었던 거죠. 그런데 작가는 자신의 모든 문장을 잃어버린 채 말 그대로 끝이 났다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글을 썼을 뿐입니다.

사실 예견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3. 오트슨 작가에 대하여

갑각나비 평 때도 썼지만 전 오트슨 작가가 책임감이 없는 작가, 뒷 이야기를 생각하지 못하는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야 휴재가 너무 기니까요. 근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트슨 작가는 그저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퀄리티로 나오지 않으면 책을 못 내는 작가였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고전적인 장인이었던 거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았을 뿐이죠.

허공 말뚝이 2권 후기에서 보면 그게 느껴져요. 글을 얼마나 많이 쓰고 지웠는지 모른다. 몇 달이나 걸려서 썼다. 힘들었다. 완결을 못 낸다고 다른 사람들이 압박하는 것도 있었으니 작가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고됐을지 이해해요. 자기도 완결을 내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글이 안 나오고, 독자들은 쪼아대고 욕하고...... 거기에 한국 라이트 노벨 중에서는 크게 히트를 치긴 했어도 객관적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을 거예요. 작가는 생계를 생각해야 했고 그래서 클로저스 시나리오 라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클로저스 시나리오는 문제가 좀 있는 내용이었고....... 그렇게 6년이 흘렀죠.

오트슨 작가는 시나리오 라이터를 그만뒀고 그 사이에 중대한 심정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화인지 퇴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트슨 작가는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를 퀄리티에 상관없이 사람들 앞에 공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대단한 거예요. 자기가 보기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그걸로 돈을 버는 게 가능한 사람 몇 없습니다. 이게 자존심을 버린 건지 아니면 작품을 보는 시야를 잊어버린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능력을 얻었어요.

오트슨 작가는 초장기 휴재를 이어가게 했던 작가적 결심을 포기하고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냅니다. 갑각나비도, 허공 말뚝이도 볼 때 뒷이야기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가 생각한 뒷이야기를 멋지게 짜낼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멋지게 짜내는 걸 포기하고 일단 뒷이야기를 열심히 써냅니다. 그래서 갑각나비는 완결났고, 허공말뚝이는 3권이 나왔습니다. 작가 후기에도 책표지 글줄에도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말보단 '끝을 내겠습니다.' '완결작이 생겼습니다.' 등, 일단 이야기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적어두었습니다.

......뭔가 이렇게 쓰다보니 인생을 정리할 각오를 가진 것 같이 행동하시는 것 같은데 미얄 시리즈 완결짓고 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진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마치 왼팔이 치료당한 것 같습니다. 오트슨 작가는 하나를 잃었지만 하나를 얻었어요. 잃은 것보단 얻은 게 큰 것 같긴 합니다. 최고의 이야기를 쓰지만 글을 안 쓰는 사람은 작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글을 쓰더라도 작가입니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글도 아닙니다. 음....... 그냥 평범하게 좋은 것 같아요. 기존에 쓰던 것보단 못하지만. 퇴보냐 진보냐를 물으면 진보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얄 시리즈를 완결낸 다음엔 현 대세인 웹소설 쪽으로 전업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현 시장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작가적 성장을 이룬 거죠.


4. 총평

그런데 독자로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앞서 말했듯이 이게 원점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아마도 한국 라이트 노벨을 가장 오랫동안 리뷰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원점의 작품이 이렇게 된 게 너무 실망스러워요.

솔직히 라이트 노벨 지금 다 망했잖아요. 일본 라이트 노벨은 이세계물밖에 안 나오고 한국 라이트 노벨은 그냥 웹소설에 흡수됐습니다. 따지자면 일본 라이트 노벨은 변질된 거고 한국 라이트 노벨은 정체성을 찾은 거긴 한데. 어쨌든 장르 자체가 소멸하고 있단 말이죠? 적어도 제가 좋아하던 장르가 말이에요. 미소녀만 나오면 되니 거꾸로 뭐든 시도할 수 있는 게 매력이었던 라이트 노벨이란 포맷이 뭐랄까.......

시작점도 정체성도 목적지도 심지어는 가는 도중에 즐길 수 있는 것조차도 다 잃어버렸는데 저는 아직도 여기 있습니다. 이제부턴 뭘 하면 좋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책은 재미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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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ra 09/21/06:33
이미 웹소설쪽으로 노선을 바꾸는 중인 저도 변절자일까요...
그것마저 시도하다가 중간에 입대크리 맞긴 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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